2025년 1월 19일 주일설교 요약 | 운영자 | 2025-01-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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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4:17-22절 개역개정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기다림은 믿음의 꽃을 피웁니다 (로마서 4장 17-22절) 1. 기다림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창세기 15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시간 속에서 현실이라는 장치로 걸러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겸손히 열매를 바라보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림은 현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루어질 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굳이 마게도냐로 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비두니아로 가도 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복음만 전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복음을 전해서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시켜야 되는 입장은 마게도냐, 비두니아, 다 같은 입장입니다. 마게도냐의 사람은 중요하고 비두니아 사람도 중요합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그런 생각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비두니아로 갔다면 그것은 복음 선포라는 명목으로 ‘자기 합리화’에 빠진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 ‘카이로스’, ‘하나님의 때’는, 지금은 마게도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자기 합리화’를 만드는 경우가 어떤 때입니까! 인생의 고난을 만나거나 삶이 쉽게 풀리지 않을 때, 또한 자신이 원하고 뜻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이끌어 가고 싶을 때가 ‘자기 합리화’에 깊이 빠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는 과정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 범사에 예수님을 닮은 자로써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아브라함의 가정에 기다림의 여정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때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여물어져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신뢰하는 시간이었고, 나의 생각과 자아를 내려놓고,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시간들을 갖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기다림은 곧 믿음
19절입니다.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무슨 말씀입니까? 사라는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어 후사를 잇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만들었습니다. 2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상황이 좋아져서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상황은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최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견고해졌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기다림은 하나님을 향해 믿음이 견고해지는 시간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로노스’ 인간의 시간에 영향을 받습니다. 세상의 시간 속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바라봤을 때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적인 방법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타파하려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다양한 유혹 중 하나가 성급하게 이루려고 하는 조바심에서 오는 현실적인 대안들입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16장 말씀을 보게 되면 에브라임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을 때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명령이셨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지파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뭐였습니까? 그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과 현실적인 상황을 놓고 무엇이 더 자신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문화를 받아들였고, 우상숭배를 함으로써 훗날 많은 어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큰 유익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이유를 붙들고 되새김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묵상의 시간을 가져야만 ‘카이로스의 시간’,‘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의 의도를 모르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다림>의 시간이 지겹고, 지루하고, 이해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합리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유익한 상황에 맞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로마서 14장 23절에서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반드시 ‘믿음이라는 끈’이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압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 ‘인간의 시간’이 불가능한 현실이라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인내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약속이 자라가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더딜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더딘 시간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가게 하는 시간이고, 약속의 말씀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가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이 더딜지라도, <기다림>의 시간을 약속이 자라가고 있는 <믿음의 시간>으로 승화시킬 수 있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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