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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2일 주일설교 요약 운영자 202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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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3:1-10절 개역개정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수 이름의 능력 (사도행전 31-10)

 

오늘 본문의 핵심은 베드로와 요한이 아닙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치유 사건의 현상도 아닙니다. 예수 이름에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이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1. 예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1절 내용을 보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가는 장면부터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서 초대교회를 이루어가는 과정속에서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미문이라는 곳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곳에서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구 시, 현재 시간으로 오후 3시쯤 되었을 때입니다. 앉은뱅이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으로 성전 미문에 갈 수 있었고, 누군가의 손길을 의지해야만 하는 구걸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422절에서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는 말씀을 통해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사람은 인생에서 별다른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구걸하는 인생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소망과 기대감이 사라지면 삶의 의미도 사라집니다. 그런 가운데 앉은뱅이는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베드로와 요한은 단순히 성전을 오가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그들에게 구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주목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여기서 주목하여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시선이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 사람을 긍휼의 마음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대하실 때 갖는 모습이십니다. 마태복음 57절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붙들고 서로를 바라볼 때,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특별히 고통당하는 사람을 배려하고 보살피며, 호의와 은혜를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그 마음으로 앉은뱅이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그렇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이 성령충만했기 때문에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으로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바라봤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런 문제들 앞에서 그 문제에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주목하여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긍휼의 마음으로 집중해서 영혼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럴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1010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도,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고 예수 이름의 능력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고침 받은 것은, 이렇게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 능력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2. 예수 이름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답입니다.

 

예수 이름만이 근본적인 문제해결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단지 현실적인 문제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육체의 필요만을 구하게 됩니다. 지금 앉은뱅이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 앞에서도 단순히 한끼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동전 몇 닢을 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이름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예수 이름을 믿는다면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묻고 아뢰지 않고, 내 방식 내 뜻대로 진행해 가면서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늘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질문들 속에서 진정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6절을 통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앉은뱅이를 향한 이 선언은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동안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그래, 오늘 하루 먹고사는 일에 만족하자, 더 이상 내 인생에 있어서 바랄 것이 뭐가 있어!’ 이렇게 자신의 현재 모습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는데, 전혀 알지도 못하는 두 낯선 남자가 나타나서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이름이었고, 앉은뱅이에게 있어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장 값지고 소망이 되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 이름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그 이름만이 인생의 소망으로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주목하며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예수 이름을 모든 이에게 소개하며 나눠줍니다. 그 이름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한 것은, 단순히 앉은뱅이에게만 국한된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혹시 낙심의 자리에 앉아있는 분이 계십니까? 자녀 문제로 인해서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분이 있습니까? 하루하루 영적 무기력이라는 자리에 눌러앉아서 이것이 내 팔자지!, 내 숙명이지!’ 신세타령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손을 내밀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주목하여 바라보라!’ ‘내 손을 잡고 일어서라!’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으라!’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고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주목하고 손을 잡았더니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렇게 예수 이름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됩니다. 요한복음 1413절에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29절에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예수 이름에는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모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눈길을 거두고 주님을 주목하여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받았을 때 회복되었던 것처럼, 진심으로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고, 낙심의 자리, 절망과 외로움의 자리, 영적 무기력감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러면 육체와 영혼이 회복되고 살아날 것입니다.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만이 우리의 힘이 되고 능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믿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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