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4일 주일설교 요약 | 운영자 | 2024-01-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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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스와 예수님 (룻기 4:1-6)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 아니라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보아스라는 이름의 뜻은 “그 안에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든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룻기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책입니다.
룻기의 주제는 ‘효(孝)’가 아니라 ‘기업 무를 자’입니다. ‘기업(基業)’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12지파와 각 가문에 분배해주신 땅을 말합니다. 즉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배하여 주신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기업 무를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고엘’인데, 이 단어는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어려움 당한 자를 구해줄 의무와 권리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엘'에 해당하는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부여되는 의무와 권리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가난하여 땅을 팔았을 경우, 그 땅값을 대신 물어주어 그 땅을 되찾도록 하게 하거나, 혹은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 갔을 경우 대신 몸값을 물어주어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들이 없이 죽어 대(代)를 잇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 그 사람의 아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억울하게 피살되었을 때, 살인자를 죽이므로 원한을 갚아 주는 것입니다. 룻기에는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오고, 같은 의미로 사용된 ‘가까운 친족’이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따라서 룻기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기업 무를 자’ 즉 ‘고엘’이라는 단어입니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 중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레멜렉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였는데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자 엘레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모압으로 이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모압 여인들과 결혼한 두 아들도 모압으로 이주하고 10년 되던 해에 잇달아 죽었습니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나오미는 이스라엘에서 가뭄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두 며느리에게는 재혼하여 새로운 삶을 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맏며느리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작은 며느리인 룻은 나오미를 따라갔습니다. 룻의 고백을 통해서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선한 영향력과 함께, 룻이 나오미를 따라간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고백입니다. 즉 룻은 모압 사람들의 신인 그모스라는 잔인한 우상을 버리고,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10년 만에 나오미가 룻을 데리고 다시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는 마침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즉 맥추절(麥秋節)의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맥추절에 룻기를 읽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왔고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지만, 나오미에게는 추수할 밭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룻이 추수하는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줍기로 하였습니다. 룻기 2:3절은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말씀합니다. “우연히”라고 했지만, 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갔지만, 그때 ‘마침’ 보아스가 그의 밭을 돌아보려고 베들레헴 성읍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습니다. 이것은 보아스에게 일종의 청혼을 한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지만,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반드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너에게 이행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룻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룻의 구속자(救贖者)로서의 의무를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라는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생략하고 ‘아무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철저히 자기희생적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 가정의 기업에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룻을 보호하는데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선권을 가진 친족은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를 권리와 의무를 모두 포기했고, 보아스는 그렇다면 자신이 나오미 가정의 구속자(救贖者) 즉 ‘고엘’이 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이웃의 불행이나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눈앞의 이익만 챙기려 하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본문의 ‘아무개’처럼 되고 맙니다. 결국 ‘아무개’는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혈통의 조상이 되는 영광스런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보아스는 손익을 따지지 않고 사랑을 위해 룻을 선택하고 자기 재산을 희생했습니다. 그 결과 보아스의 이름과 그의 아름다운 행위는 성경에 영원히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룻처럼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된 이방인이었고, 죄 아래 팔려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보아스는 한 가정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희생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그분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 삶이 회복되고 행복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이 진정 나의 모든 것과 신랑이 되시면, 우리도 룻처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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