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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0월 1일 주일설교 요약 | 운영자 | 2023-09-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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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12:1-2절 개역개정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성도가 드려야 할 예배 (로마서 12:1-2) 명절을 지내는 것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 새로운 풍속도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역귀성’ 현상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고, ‘명절증후군’을 유발하는 주된 원인이었던 음식 준비도 시장이나 마트에서 제조된 음식을 사다가 상에 올리는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또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나 죽거든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유언하는 부모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가족이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예수를 믿더라도 천주교를 나가지 교회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허용하고, 신부들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핍니다. 그래서 남자들 입장에서는 천주교에 가면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에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생각하여 결사반대함으로써 1만명이나 되는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1939년 로마 교황청이 제사는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라는 교서를 내림으로써 제사를 허용했습니다. 또 천주교 교리에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드리는 것이 있어 죽은 자를 위해 제사 지내는 것이 교리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양속이 아닙니다. 제사는 고려 말에 중국으로부터 주자학(朱子學)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제사가 민간에 널리 보급된 것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쿠데타로 인한 민심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효심(孝心)을 이용하여 조상제사를 적극 장려했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명백한 우상숭배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면, 조상귀신이 와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국과 밥을 공양(供養)하고 음복(飮福)을 하는 등 정성을 다합니다. 지방(紙榜)을 쓸 때도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쓰는데, 그 뜻은 "배우는 학생으로 인생을 살다 돌아가신 조상의 신령이시여, 나타나서 이 자리에 임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되며, 그 후에는 이 세상과 교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작 돌아가신 분들은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는지 지내지 않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섬김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한 초기 선교사들은 귀신을 섬기는 제사 대신 기독교식 ‘추도(追悼)예배’를 장려했습니다. 추도예배는 제사의 좋은 의도는 유지하되 우상숭배적 요소를 배제하여 기독교적 의식으로 바꾸어나가자는 취지로 장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추도예배’라는 용어도 바꾸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추도(追悼)’라는 용어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추도’의 뜻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데,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의식에 예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명절 가정예배’라는 명칭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로마서 12:1-2절은 성도들이 드려야 할 예배는 어떤 예배이며, 성도들은 세상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1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는 성도들이 드려야 하는 예배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를 드리는 대상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한 분,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예배에 드려지는 예물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삶입니다.셋째는 예배의 성격입니다. 바울은 성도가 드리는 예배를 ‘영적인 예배’라고 하였는데, ‘영적인’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합리적이며 합당한’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제사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말 성경의 번역대로 ‘영적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드려야 할 예배는 구약시대의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성전 제사가 아니라, 내적이고 영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세상 문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로버트 웨버’는 세 가지 모델을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분리의 모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문화와 대립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견해는 세상 문화는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 있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입장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다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오류에 빠지게 해서 결국 신자로 하여금 속세를 떠나도록 만듭니다.
둘째는 ‘동일시 모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문화를 지지하고 그것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견해는 세상의 문화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회가 세속화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변혁의 모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로마서 12:2절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은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합니다. 이 견해는 복음에는 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문화까지도 변혁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를 완전히 배제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이 문화에 잠식당해서도 안 됩니다. 도리어 우리는 문화를 변혁해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타락한 세속적인 문화를 변혁해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분별하고 통제할 수 있는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려면 먼저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은 ‘중생(重生)’을 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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