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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4월 2일 주일설교 요약 | 운영자 | 2023-03-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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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棕櫚主日)의 예수님 (요한복음 12:12-19)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는 이름은 ‘고난주간’의 첫날인 주일 아침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12절에서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한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서 유월은 한문으로 “넘어가다”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을 히브리어로는 ‘페사흐’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파스카’라고 하며, 영어로는 ‘pass-over’라고 하는데, 모두 “넘어가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넘어갔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내리신 열 번째 재앙인 ‘장자들의 죽음’ 재앙이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장자는 그 집 식구들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한 것은,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것을 상징합니다. 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그들도 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장자들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속(代贖)’하여 어린 양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어떤 사람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실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대속자(代贖者)’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한 유월절 어린 양은,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예표와 모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9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언하였으며,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5:7절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이심을 증언하였습니다.
14절을 보면,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11:2절과 누가복음 19:30절은 예수님이 타신 ‘한 어린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였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왜 나귀를 타셨을까요? 그리고, 왜 나귀 중에서도 ‘한 어린 나귀, 즉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첫째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린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스가랴서는 “겸손하여서” 멍에 메는 짐승인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또 하나의 이유는 나귀가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전쟁이 끝나면, 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평화의 소식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타시기에 가장 적합한 동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귀 중에서도 “어린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마가복음 11:2절과 누가복음 19:30절에서 강조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계십니다. 따라서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려질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다시 말하면, 사람의 손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 나귀 새끼여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모든 가축의 첫 새끼는 십일조처럼 번제(燔祭)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지만, 가축 가운데 나귀는 예외였습니다. 나귀는 굽이 갈라지지 않고, 되새김질도 하지 않아 부정한 동물을 대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귀의 첫 새끼는 번제물로 바치지 않고, 목을 꺾어 죽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으로 나귀의 첫 새끼를 대속하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고 죽어야 할 것은 나귀의 첫 새끼였습니다. 그러나, 나귀의 첫 새끼 대신 어린 양이 율법의 저주를 받고 죽었습니다. 이것을 속량(贖良) 혹은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어린 양의 대속으로 살아난 나귀의 첫 새끼는 우리들의 모형입니다. 우리 역시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며,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지금 나를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 가까이 이르시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9:42-44절에서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너의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너의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너의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였지만,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호산나”라는 외침은 나흘 후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폭도들의 아우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종려주일을 지키지만, 혹시 우리에게도 “평화에 관한 일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오직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돌변한 유대인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인들과 교회를 보시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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