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문

  • 홈 >
  • 말씀과 찬양 >
  • 주일설교문
주일설교문
2022년 4월 10일 주일설교 요약 운영자 2022-04-08
  • 추천 0
  • 댓글 0
  • 조회 271

http://biglovech.onmam.com/bbs/bbsView/42/6067218

종려주일(棕櫚主日)의 교훈 (마태복음 21:1-11)

 

종려주일은 사순절(四旬節)의 마지막 주간이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합니다. 이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주간의 금요일인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벳바게라는 동네에서부터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겉옷을 길에 펴고,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을 하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이나 장군을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기를 숨기려는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날에는 무리들이 즐거이 부르는 호산나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이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제자들을 책망하려고 하자, 예수님은 "만일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행동을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자 만왕의 왕이신 것을 선포하신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는 스가랴서 9:9절에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예수님은 그냥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어린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두 번째 이유는, 마가복음 11:2절에서 강조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유월절 규례에 의하면, 유월절에 사용할 어린 양은 유월절 나흘 전에미리 취해서 집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런데, 종려주일이 바로 유월절 나흘 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 나흘 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어린 양을 죽여서 여러 부위로 잘라 담는 그릇은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깨끗한 그릇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세 번째 이유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명령하시기를 모든 가축의 첫 새끼는 십일조처럼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귀는 예외였습니다. 나귀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아,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귀가 첫 새끼를 낳으면, 번제물로 바치지 않고 목을 꺾어 죽였습니다. 하지만, 만일 나귀의 첫 새끼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고 싶으면,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속량(贖良)하라는 율법에 따라 어린 양 한 마리를 대신 바쳤습니다. 그러면, 어린 양으로 나귀의 첫 새끼를 속량했기 때문에, 나귀의 첫 새끼가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에는 영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 양의 피로 나귀 새끼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하신 것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며,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민중은 사흘 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로 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무력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 아침, 군중들은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의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라는 감격의 외침은 사흘 후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폭도들의 외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다만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면, 우리도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돌변한 유대인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과 교회를 보시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2:19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너희 하는 일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일을 말합니다. 백성들은 메시아를 갈망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였지만, 정작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고, 또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도 가르쳤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설교자들이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 특히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과, 또 주님께서 모든 죄악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한국교회가 이처럼 부패하고 타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려주일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시려고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순결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입니다. 두 번째는 오직 세속적인 목적과 이기심으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한 군중들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에 대한 시기심과 기득권을 잃을 것에 대한 염려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 가운데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어디에 속해야 하겠습니까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022년 4월 17일 주일설교 요약 운영자 2022.04.16 0 202
다음글 2022년 4월 3일 주일설교 요약 운영자 2022.04.01 0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