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0일 주일설교 요약 | 운영자 | 2022-03-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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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소망으로 (예레미야애가 3:19-26)
오늘 설교 본문은 예레미야애가(哀歌)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유대인들의 5대 축제일에 읽는 성경중의 하나인데. 유월절, 맥추절, 금식절, 초막절, 부림절, 이 5대 절기에는 ‘메길로트’ 라고 하는 ‘다섯 두루마리’ 성경을 읽는 전통이 내려져오고 있습니다. 즉 ‘유월절’에는 ‘아가서’를 읽고, ‘맥추절’에는 ‘룻기’를 읽고, ‘초막절’에는 ‘전도서’를 읽고 ‘부림절’에는 ‘에스더서’를 읽고, ‘금식절’에는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애가’를 읽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직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날의 슬픔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날 하루 동안 가슴을 치고 금식하면서 예레미야애가를 읽었는데, 예레미야애가의 뜻은 ‘예레미야가 부른 슬픈 노래’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서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반면, 예레미야애가는 멸망한 예루살렘을 돌이켜보면서 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과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하며, 처녀와 소년들이 칼에 맞아 죽고, 굶주린 여인들이 자기 아이를 삶아 먹는 참담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암울한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다섯 곡의 슬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다섯 개의 탄식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시들은 유다왕국의 황폐함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하여 탄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지만, 실제적인 내용은 유다백성들에게 임한 재난과 예루살렘의 폐허로 인하여 갖게 된 충격을, 탄식시라는 형식을 통하여 신앙으로 극복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설교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9-20절을 보면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조국, 특히 하나님이 택하신 곳인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는 모습을 보면서, 심한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여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3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3:1-18절에서 예레미야는 지금 이 최악의 상황이 전부 다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18절에서는 “이제는 하나님께 두었던 소망이 다 끊어졌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40년 동안 옥에 갇히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그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예레미야 선지자였지만, 이렇듯 엄청난 고통과 비극 앞에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그에게 낙심하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19-20절에서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의 “기억하소서”라는 말은 잘못된 번역이고, 원래는 “기억합니다”가 맞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조국에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생생히 기억나서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눈을 감아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기억하니까, 그 결과 낙심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완전히 낙심에 빠지고 소망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는데, 놀랍게도 예레미야가 갑자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갑자기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22-23절에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라고 그 이유를 말합니다.
힘들고 비참한 상황이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고통스런 일들을 기억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을 주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일어난 비참한 일들과 현재의 상황만 기억하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셨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 하고 묻는 데서 그친다면, 마음이 답답하고 화도 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슨 뜻인가를 물으며,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신 데에는 분명히 선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주님의 인자하심이 다함이 없고 그분의 긍휼하심이 끝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 안에서 다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예레미야에게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21절을 보면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라고 합니다.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마음속으로 깊이 고민하고 묵상하며 생각했습니다. 일어난 사실들만을 보거나 과거의 아픔들을 기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비참한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 것입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마음에 담아 두고 깊이 생각하며 재해석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다. 주님께서 분명히 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은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고난 그 자체만 보기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고난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성찰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서 삶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고통과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그 때에 완전한 절망만을 맛본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 오히려 소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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