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3일 주일설교 요약 | 이봉선 | 2022-01-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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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날, 하나님의 날 (베드로후서 3:1-13) 오늘 설교 본문은 베드로후서입니다.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순교하기 직전인 주후 67-68년 사이에 로마에서 기록했습니다. 베드로는 3:1-4절에서 본서의 기록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비웃는 자들이 나타나서 성도들을 미혹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언자들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상기시켜, 재림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이 글을 기록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주로 로마제국의 박해로부터 비롯된, 외적 고난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베드로후서는 이보다 더욱 심각한, 사단의 궤계(詭計)에서 비롯된 교회 내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후서는 ‘교회 안의 독소’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교회 안의 독소’는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날의 교회에서 사라진 이유는, 이단들이 거짓 진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재림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성령의 강림하심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소망과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에 대한 성경의 바른 가르침은 성도로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한 사람들의 주장이 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 이래로 세상의 모습과 자연 법칙이 변하지 않고 규칙적인 것처럼, 구약의 조상들도 수없이 잠들었지만, 세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이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다. 따라서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은 없을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5-6절에서 만물은 창조 이래로 변함이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노아의 홍수’를 예로 들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세상이 불변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결정적인 반박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에 대한 예표(豫表)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7절에서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면서 하늘과 땅을 남겨두신 것은, 미래에 있을 불에 의한 심판을 위해서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계가 우주적인 대홍수로 말미암아 한번 멸망을 당한 바가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또 다시 우주적인 불의 심판으로 파멸을 당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베드로는 8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세가 기도한 시편 90:4절의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라는 고백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이 말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천 년은 하나님의 하루에 불과한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베드로가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말한 이유는, 주님의 재림이 한없이 늦어진다고 생각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9절에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10절에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오래 참고 계시지만, 영원히 참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지만, 그 때가 정확히 언제가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11절에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반문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또는 우리가 자랑하고 의지하고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모두 불타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언젠가는 썩어지고 불타 없어질 것들을 보물단지처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11절 하반절과 12절 상반절에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로 거룩한 삶, 즉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27절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날’은 ‘주의 날’과 같은 날이지만, ‘주의 날’이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을 강조한다면, ‘하나님의 날’은 믿는 자들에 대한 구원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12절 하반절과 13절에서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도적 같이 임할 ‘주의 날’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지닌 신앙인은 ‘주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모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날’은 심판과 함께 죄로 물든 옛 세상은 사라지는 날인 동시에,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하나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만물이 새로워지는 새 창조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그날을 더욱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은 반드시 임하게 됩니다. 그 날은 도적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경건한 행실과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바라보며 간절히 그 날을 사모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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