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31일 주일설교 요약 | 운영자 | 2021-10-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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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종교개혁 (로마서 1:17) 오늘은 ‘종교개혁 504주년 기념일’입니다. ‘종교개혁 기념일’은 1517년 10월 31일,독일의 카톨릭교회 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그가 시무하던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교황(敎皇)이 면죄부(免罪符)를 판매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재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세계의 역사를 바꾼 종교개혁의 시발점(始發點)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동기가 된 교황의 면죄부 판매는, 명목상으로는 로마에 있는 성(聖) 베드로 성당의 부족한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면죄부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면죄부라는 명칭은 개신교에서 하는 말이고,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명칭은 ‘면벌부(免罰符)’입니다. 천주교에서 판매했던 면벌부는 죄를 면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에 따른 벌, 즉 잠벌(暫罰)을 탕감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교리에 의하면, 죄에 대한 용서를 받더라도, 그 죄에 대한 대가-잠벌-를 치러야 합니다. 이 잠벌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보속(補贖)을 해야 합니다. 보속이란 지은 죄에 대하여 고해성사(告解聖事)로 죄의 사함을 받고, 죄 사함을 위하여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것입니다. 즉, 비록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웃과 하나님께 끼친 해를 갚기 위해 가능한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속의 방법에는 자선, 기도, 단식(斷食)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과 함께 봉사, 절제, 희생, 헌금 등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세(現世)에서 잠벌을 탕감받지 못하면, 죽은 후에 연옥(煉獄)에 가서 잠벌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살면서 계속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인데, 어떻게 죽기 전에 잠벌을 다 탕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천주교 교리에 의하면, 순교자나 특별히 성인(聖人)으로 추앙되지 않는 한, 모두 연옥에 가서, 탕감받지 못한 잠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면벌부는 바로 그 잠벌을 모두 –과거의 죄든 미래의 죄든- 면제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가족을 위해 면벌부를 사면, 면벌부를 사는 즉시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천주교는 각종 세금에 힘겨워하던 일반 평민들에게까지, 각 목적에 해당하는 면벌부를 세분화하여 발부하여, 한 가족이 여러 개를 구입하도록 유도하였고, 이 막대한 자금은 곧장 교황청으로 집결하였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사실에 분노하여, 95개조의 반박문에서 면벌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했습니다. 루터는 처음에는 교황의 면제권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면벌부를 사면 죄가 용서된다, 즉, 돈만 내면 천국에 간다”는 면벌부의 오용(誤用)과 남용(濫用)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루터는 “죄 사함과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주어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루터는 95개조의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루터의 일생을 바꾸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1: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루터의 일생에서 세 차례 큰 감동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가 신학교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그에서 입니다. 두 번째는 볼로그나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세 번째는 순례자들과 함께 방문한 로마에서였습니다. 이 세 번의 경험을 통하여,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인간의 올바른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복음에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 선물로 받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루터 앞에 나타난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값없이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그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이라는 세 가지 표어를 그들이 요구하는 개혁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첫째로 ‘오직 믿음’을 강조한 것은, 천주교의 면벌부 판매를 반대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 사함과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오직 은총’을 강조한 것은, 천주교의 공로 사상을 반대한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구원은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셋째로 ‘오직 성경’을 강조한 것은, 천주교에서 교황의 권위를 성경 위에 두고, 성경에도 없는 온갖 교리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는 모든 교리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주장은 변질되고 오용되기 시작합니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총’이라는 표어는, 지나치게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고, 구원받은 자들이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행위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점차 ‘싸구려 은총 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 역시 오직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함으로써, ‘성경 문자주의’라는 새장 속에 기독교를 가두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개신교(改新敎)를 다른 말로는 ‘개혁교회(改革敎會)’라고 합니다.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결과로 탄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우리는 종교개혁의 결과로 탄생하였다”는 것으로 자만하거나 안주하면 안 됩니다. “개혁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악된 부패성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개혁교회를 개혁 이전으로 돌려놓으려는 사탄의 끈질긴 방해 공작이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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