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7일 주일설교 요약 | 운영자 | 2024-04-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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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예레미야애가3:19-26절 개역개정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희망을 노래합시다 (예레미야애가 3:19-26) 엘리엇이라는 영국 시인은 ‘황무지’라고 하는 유명한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시에서 황무지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황폐해진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요? 겨울 언 땅을 뚫고 나와야만 어린싹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잔인한 것은 그렇게 언 땅을 뚫고 나와보아야 여전히 황무지라는 것입니다. 즉 4월은 진정한 소생을 가져오지 않고 공허한 추억으로 고통만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4월에 같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 시가 있습니다. 박목월 시인의 ‘4월의 노래’라는 시입니다. ‘4월의 노래’는 6·25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53년 봄 <학생계>라는 잡지가 창간 4월호를 낼, 때 학생들을 위한 새 노래를 싣자는 동기에서 박목월에게 작시를, 김순애에게 작곡을 위촉하면서 탄생했습니다. 박목월 시인은 이 노래에서 당시 6·25의 비극이 끝나지 않았지만 어린 소년·소녀를 통해 절망을 딛고 평화를 노래하려는 간절함을 담았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 시가 성경에도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애가(哀歌)’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직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의 뜻은 ‘예레미야가 부른 슬픈 노래’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과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하며, 처녀와 소년들이 칼에 맞아 죽고, 굶주린 여인들이 자기 아이를 삶아 먹는 참담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암울한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다섯 곡의 슬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애가’입니다.
그는 40년 동안 유다를 향하여 눈물로 예언을 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하나님을 떠난 삶을 계속 살면 망할 것이라고 예언해 왔지만, 막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보자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곳이 이토록 유린되고 파괴될 수 있습니까?” “왜 이런 비극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유다에게 일어납니까?” “어떻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굶어죽고, 칼에 맞아 죽고 있는데, 그냥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십니까?”하고 탄식하며 물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조국에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생생히 기억나서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이미 자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 참혹한 상황이 자꾸만 기억나기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통스러운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날 때 왜 그런지 그 답을 얻지 못해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괴로운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칼에 찔리는 것처럼 느껴지고 아픕니다. 그때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거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생각하면 소망과 위로를 얻지만, 과거와 현실의 고통을 생각하면 낙심과 괴로움을 더할 뿐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낙심에 빠지고 소망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는데, 놀랍게도 예레미야가 갑자기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고통스런 일들을 기억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주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사건들을 기억하니까 낙심이 되었지만,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오히려 소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 상황이 무슨 뜻인가를 물으며,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신 데에는 분명히 어떤 선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의 인자하심이 다함이 없고 그분의 긍휼하심이 끝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안에서 다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현실 때문에 마냥 괴로워하고 낙심하고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눈으로 재해석하여 보면, 힘들고 괴로운 형편 속에서도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무궁한 자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고난 그 자체만 보기 때문에 실망하고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고난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성찰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서 삶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습니다. 그때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지 않는 사람은 고난으로 넘어지지만, 믿는 사람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슬픔 중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에 대하여 22절에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옛 언약 속에 거하던 유다 백성들을 끝까지 돌보신 하나님께서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언약의 자녀가 된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25-2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을 당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무관심하거나 무력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자기 백성을 징계하고 연단하셔서 자원하여 율법을 준수하는 백성을 만드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계시며,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4월 10일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심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마음 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는 교회와 성도들의 삶만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만물을 통치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총선 이후에 나라에 혼란이 없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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