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9일 주일설교 요약 | 운영자 | 2022-06-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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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1) (마태복음 5:1-12)
예수님은 팔복(八福)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팔복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복과는 관계가 멉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예수님은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첫 번째 복으로 시작해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여덟 번째 복으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복이 있는 이유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체가 복이 아니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체가 복이 아니라, 그런 사람에게 천국이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나는 복입니다. 즉, 팔복의 핵심은 이 세상에 속한 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팔복은 산상수훈 가운데 나온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를 산상수훈(山上垂訓), 혹은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왕이 보좌에 앉자, 신하들이 그의 명령을 들으려고 앞으로 나오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실제로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왕으로서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천국이다. 그리고 너희는 천국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천국의 백성답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하라. 그러면 이런 복을 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에 들어가거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라고 말씀하시고, “지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나온 제자들은 이미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며, 이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팔복은 전부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처럼 신자들의 이미 변화된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팔복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사람들의 바뀌어진 생각과 가치관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통해서 신자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팔복의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난한 마음을 첫 번째 복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바로 믿음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팔복의 순서는 예수님이 무작위로 배열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성장의 단계를 차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번 주일과 다음 주일 두 번에 걸쳐서 차례로 필복을 살펴보겠습니다. 팔복을 살펴보는 가운데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세상과 사람 앞에서 부귀영화를 추구했던 과거의 인생이 너무나 헛된 것임을 깨닫고, 그런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생활 태도와 습관으로부터 완전히 되돌아선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못 박하신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조건, 자격, 공적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한 자, 즉 심령이 가난해진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처럼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어 그 믿음이 출발하는 복입니다.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의 복”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히 채워져 있지 않은 가난한 심령 때문에 애통해하고, 죄와 세상과 사탄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고 멀어진 것에 대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그 슬픔을 달래주는 위로가 절실하며, 그러기 위해선 그 슬픔의 원인이 되었던 것을 제거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진 것을 슬퍼하고 그 회복을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연히 가까이 임재하여 멀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의 복’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함은, 하나님의 위로를 이미 받았기에, 어떤 세상의 죄악과 사탄의 시험이 위협할지라도, 그분이 지켜 주심을 확신하고 흔들리지 않는 심령의 평강을 말합니다. 즉 비록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도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목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림과 목마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적으로 거듭난 신자들이 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인 욕구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교회 일이나 종교적 행사에 열심으로 참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갖고 계신 뜻을 분별하여, 자기의 삶 속에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을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복은 ‘배부름’입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배부름’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포만감이 아니라, 영적인 만족을 말합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도들의 목자가 되셔서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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