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4월 21일 주일설교 요약
- 운영자 2024.4.19 조회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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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교제 (요한일서 1:1-4)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한 때는 주후 90년경입니다. 이 시기는 밖으로는 당시 집권자들과 이방 세계의 박해가 있었고, 안으로는 각종 이단 사상으로 인한 분열이 있었던 때입니다. 초기 기독교에 가장 위협적인 이단은 ‘영지주의(靈知主義)’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을 영지주의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영지주의는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두 가지 그릇된 전제를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첫째, 정신과 물질에 관한 이원론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은 본래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전제의 결과로, 영지주의자들은 몸으로 행한 일들은 아무리 지독한 죄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적인 삶은 영적인 영역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영지주의자들은 소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은밀히 계시되는 ‘영적인 높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영지주의는 "안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그노시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를 영어로 ‘그노시즘“이라고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한 더 높고 깊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특권 계층에 속해 있다고 자부합니다.
구원에 관해서 영지주의는 어둠의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신성한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을 통해 얻는 구원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이 전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신 예수님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헬라의 이원론(二元論) 사상에 입각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연합을 부인했습니다. 그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인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곧 성육신에 기초하여 세워진 기독교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 영지주의는 ‘가현설(假現說)’과 ‘케린투스설’이었습니다. 먼저 ‘가현설’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몸은 천상의 그리스도의 환영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케린투스설’은 사도 요한과 동시대 유대인 학자인 케린투스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사이에 자연적으로 출생한 아들이었으며, 천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라는 인간이 세례받을 때 그의 몸 안에 들어갔다가, 그가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도로 나왔다는 주장입니다.
‘케린투스설’에 의하면 인간 예수와 천상의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존재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한 영지주의의 이단 사상 속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어떤 사랑도 찾을 수 없고, 구속의 은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부인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며 돌아가신 사건을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은 1:3-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요한일서를 기록한 세 가지 목적이 순서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이고, 둘째는 사귐이고, 셋째는 기쁨입니다. 이 세 가지 단어는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일 뿐 아니라, 사도 요한의 영성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첫 번째 사도 요한의 영성의 핵심단어는 ‘생명’입니다. 1-2절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보았고,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표현을 사용해서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당시 교회를 위협한 이단인 영지주의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지상의 예수는 천상의 그리스도에 대한 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지금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도 요한의 영성의 핵심단어는 ‘사귐’입니다. 3절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죄 용서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살아계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에 참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없으면 사귐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귐 이전에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 사도 요한의 영성의 핵심단어는 ‘기쁨’입니다. 4절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 나누는 사귐에는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감각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공급받는 강력한 힘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려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귐을 가지기 전에는 결코 기쁨을 알 수 없고 충만하게 누릴 수도 없습니다.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의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분과 사귐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자신이 경험한 사귐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고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사실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실을 믿기만 하면 그에게는 하나님과 참된 교제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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